천년을 이어온 길, 쿠마노고도(熊野古道) 숲길을 가다

후~웁 하고 숨을 들이마시면, 훅~ 하고 바다의 습한 공기와 삼나무 향기가 코를 찌른다. 일본의 순례길, 쿠마노고도(熊野古道)에서다. 

1300년에 걸친 도읍지였던 간사이 지방 남쪽에 위치한 와카야마현(和歌山), 나라현(奈良), 미에현(三重)에 걸쳐 있는 일본의 옛 순례길 쿠마노고도. 이 길은 문화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일본의 세계문화유산은 현재 14개)으로 등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길에 이어 ‘길’로서는 세계 두 번째 등재된 것이다.

교토에서 시작해 쿠마노산잔(熊野三山)인 쿠마노홍구 대신전, 쿠마노 나치 타이시, 쿠마노 하야타마 타이시를 참배하는 순례길은 기이반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부분 쿠마노홍구 대신전으로 연결된다. 고야산에서 시작하는 코헷지길, 키타나베에서 시작하는 나가헷지길, 이세신궁에서 시작하는 이세지길이 유명하며 총 연장 700킬로미터가 넘는다. 헤이안시대(794~1192) 중반부터 순례자들이 많아졌고 16세기부터는 귀족뿐만 아니라 무사, 서민 등 일반인 모두에게 열린 길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이세지(伊勢路)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참배한 많은 이들이 지나간 서민의 길, 모두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쿠마노고도 도보여행에서는 이세지길 일부를 걸었다. 쿠마노홍구에서 이세신궁으로 가는 길로 가장 인기 있는 코스로 알려져 있다. 이세신궁은 2천년 전 창건되어 황실의 조상신을 모시고 있는 일본 최대의 신사이자 가장 오래된 건축양식으로 일본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 내가 걸어본 길은 이세신궁에서 제법 떨어진 마츠모토도게와 토오리도게로 10킬로미터 정도의 고갯길이다.


서민의 길, 이세지 마츠모토도게
오사카에서 전철과 로컬JR을 번갈아 타며 반나절 만에 도착한 쿠마노고도센터. 한국어로 된 이세지 지도와 자료를 구할 수 있었다. 이후 오오도마리역으로 이동했다. 간이역까지 연결하는 일본의 대중교통망을 실감하며 도착하니 오오도마리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하루에 열 번 기차가 다니는 무인역, 오오도마리역에서 마츠모토도게를 통해 쿠마노시로 간다. 

마츠모토(松本)도게는 오오도마리와 쿠마노시를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입구에 쿠마노고도라는 단어와 함께 킨키자연보도라고 적힌 알림판이 있다. 일본은 1970년대부터 열도 전역에 걸쳐 지역의 다양한 옛길, 문화?역사?자연자원을 엮어 ‘걷기 좋은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를 ‘장거리 자연보도’(Long Distance Nature Trails)라고 부르는데 킨키자연보도는 킨키 지역의 자연보도를 일컫는다. 현재 전국에 여덟 곳, 2만여 킬로미터에 달하고 연간 6천만 명 이상이 찾고 있다. 한국의 많은 관련단체에서도 벤치마킹을 하기 위해 다녀갈 정도다. 쿠마노고도가 킨키(간사이의 옛 이름) 지역에 있어 킨키자연보도로 묶어 함께 관리하는 것일 터, 마츠모토도게길은 오오도마리와 쿠마노시를 잇는 2차선 도로에서 들어서면 만날 수 있다. 

삼나무숲으로 들어서자 주변이 고요해진다. 적막할 정도다. 쭉쭉 뻗은 나무 사이로 0.8미터 폭의 길이 보이는데 거미줄 같은 나무뿌리가 돌다다미를 덮고 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초록 이끼도 퍼져 있다. 바다로부터, 저 내륙으로부터 고개를 넘어 온 다습한 기온과 삼나무 그늘이 덮여 돌다다미와 이끼, 숲이 한 몸이 되어 오랜 순례길을 완성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인들이 믿고 있는 만물의 가미(정령)들과 함께 걷는 기분이 들었다.

5-600미터의 가파른 길을 오르면 고갯마루에 아이들의 수호신, 지조석상이 있다. 지조는 도깨비로 오인해 총에 맞아죽었다고 전하는 수호신을 가리킨다. 고갯마루에서 길은 두 가닥으로 나뉘는데 옛 오니가조성을 거쳐 곧바로 해안에 닿는 길은 벚꽃으로 유명해 봄철에 가야 제격이다. 또 다른 길은 고갯길을 바로 내려서는 길이다. 쿠마노시역을 경유해 해안도로로 이어지는데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중 하나인 시치리 미하마(七里御浜)길을 걸을 수 있다.

고개를 넘으니 삼나무와 대나무가 공존하는 숲으로 바뀐다. 교토의 대나무가 굵기로 유명하다는데, 마츠모토도게의 대나무도 그에 못지않은 듯하다. 숲이 끝날 즈음 쿠마노고도는 일반 가정집 앞마당을 지나며 마을로 내려서게 된다. 도중 한 집주인을 만났는데 여행자들이 지나는 걸 당연히 여기는 듯 살짝 눈웃음을 하고는 하던 일을 한다. 다시, 토오리도게로 향했다.

쿠마노시 지역의 하이라이트, 토오리도게와 다랑논
쿠마노시역 앞에서 탄 75번 버스가 바다를 벗어나며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몇 번의 터널을 지난다. 30분쯤 달려 토오리도게 입구에 정차한다. 토오리도게는 5킬로미터 남짓한 라운딩코스로 삼나무고갯길과 돌다다미길, 그리고 다닥다닥 좁은 다랑논이 인상적인 곳이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어진 우리의 다랑논과 쏙 빼닮았다. 그 길을 걷고 싶어 이세지길 중 쿠마노시 지역을 선택했고 토오리도게는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가파른 길을 오르기 전에는 지팡이를 꽂아둔 장소가 있다.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배려다. 한참을 오르니 토오리도게 정상부, 수호신 고야스지조 석상이 있다. 길옆 돌로 지은 오두막 안에 모셔져 있는데 소박한 것이 우리의 서낭당이나 민불과 많이 닮았다. 내려서는 길 끝에 사용한 지팡이를 반납하는 곳이 보인다. 그리고는 조금 뒤 포장길이 나오고 마루야마 센마이다로 불리는 천여 개의 다랑논이 펼쳐진다. 

일본에서도 다랑논 지역으로 유명한 마루아마 센마이다. 400년 전에는 100미터 높이의 언덕에 2200개의 논이 빽빽한 곡선을 그리며 존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550여개로 줄었다가 지금은 지역민과 지자체의 노력으로 다시 1300여개의 다랑논으로 늘어났다. 아름다운 경관이 되살아난 것이다. 마침 이날도 ‘출사’에 나선 십 수 명의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지리산 자락 벌판도 이렇게 누런 벼가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네 풍경을 잠시 그리워하며 다랑논을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쿠마노고도와 우리의 옛길
바다와 삼나무, 대숲과 옛고개, 일본의 서낭당과 석상, 황금들녘의 다랑논… 특별할 수도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순례길. 3일에 걸쳐 10킬로미터 남짓한 두 고갯길을 걸어보았다.  쿠마노고도의 전체 거리가 700킬로미터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 여행길이었고 분명 제대로 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신의 앞마당을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쿠마노고도로 내어 준 지역주민, 그 길을 고마움과 고요함으로 보답하며 묵묵히 걷는 순례자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쿠마노고도와 함께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모두를 보았다.

지금처럼 쿠마노고도가 있기까지는 천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길의 가치를 모두가 공감하고 길을 찾는 이들이 순례자의 마음으로 주민들의 삶을 이해하며 걷기까지, 많은 부침을 겪으며 변화와 성숙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은 어떤가?

지금 한반도는 걷기 열풍이 불고 있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 그렇고 변산 마실길, 울진 숲길, 고창 질마재길이 새롭게 길을 열고 있다. 다양하게 걸을 수 있는 길들이 생겨나는 중이다. 이처럼 우리의 길도 수십 년부터 수백 년까지 다양한 삶의 흔적이 녹아있는 아름답고 눈물겨운 길들이다. 그 옛길의 가치에 이제서야 눈을 뜬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의 가치를 찾아 길을 엮고 자연스럽게 만들어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길이 자연스러워지기 위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연결된 길을 받아들이기 위한, 걷는 이들이 순례자의 마음으로 걷기 위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게 지역의 특성을 살려 옛 사람들의 삶과 문화, 역사를 담고 길 위에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순례길이 다양하게 탄생한다면? 더 이상 쿠마노고도가 부럽지 않을 것이다. 


information_ 쿠마노고도(熊野古道) - 마츠모토도게 & 토오리도게

>>가는 방법 
간사이공항 기점으로 오사카에서 JR을 이용, 쿠마노시역까지 5시간 정도 걸린다. 쿠마노고도센터가 있는 오와세역까지는 40분쯤 걸린다.
*** 마츠모토도게 쿠마노시 시내를 관통해 오오도마리역으로 이어진 길이며 4킬로미터 정도다. 지도는 쿠마노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시내 숙박은 5000엔 안팎.
*** 토오리도게 쿠마노역 맞은편 정류장에서 버스를 이용, 토오리도게 입구에 내린다. 30분쯤 걸린다. 토오리도게를 넘어 다랑논으로 이어지는 라운딩 코스는 5킬로미터 정도다.

>>쿠마노고도센터
오와세(尾鷲市)역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에 있는 쿠마노고도센터(kumanokodocenter.com)는 2004년 쿠마노고도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후 관련 연구활동을 펼치며 순례자들을 위한 안내와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지도와 교통편, 숙소 등 자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영어와 ?한국어로 된 지도가 있으며 각종 전시와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한편 6~80년생 쿠마스기 6500여 그루를 사용해 솔향기가 가득한 센터에서도 순례길과 연결된다. 돌다다미로 유명한 마고세도게 6.5킬로미터 코스를 걸을 수 있다.


* 2009. 10. 사람과 산에 쓴 글.


<마츠모토 도게 풍경, 오래된 이시다다미와 삼나무 대나무가 조화를 이룬다>

<동네 담벼락에 있는 마츠모토 도게, 오니가조 이정표>

<마츠모토 도게 정상부에 있는 지조 석상>

<지도에 있는 17번 마츠모토 도게와 21번 마루야마 센마이다길을 걷고 왔다>

<오니가조 성에서 바라본 바다>

<무인 간이역인 오오도마리역(대박역). 마츠모토도게를 통해 쿠마노시로 갈 수 있다.>

<쿠마노고도 센터, 들어가면 삼나무향이 코끝에서 가득 퍼진다>

<우리 허승의 뒷태, 마츠모토 도게 올라가는 길>

<마츠모토 도게 정상부, 기념 스탬프를 찍고, 소감을 적는 노트가 놓여있다>

<토오리도게 입구, 오래된 찻길인데 차의 흔적보다는 숲을 메우는 푸른 이끼가 주인이 되었다>

<돌다다미길. 천년이 세월이 흐른 돌다다미를 삼나무 뿌리가 거미줄처럼 덮고 있다>

 <우리 허승의 앞태, 토오리도게 들머리와 날머리에는 지팡이를 이용할 수 있도록 비치해놓았다.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배려>

<마루야마 센마이다, 천여개의 다랑논 : 우리 지리산도 지금 이렇게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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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나무 | 2009/10/14 18:50 | 길에서 길을 묻다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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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바로서기 at 2009/10/14 23:15
둘이서 정말 좋았겠는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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